어떻게 연구를 할 것인가
어쩌다 보니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부터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어떻게 연구를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간략히 적어 봅니다.
1. 대학원생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다
학생은 학술적 지식의 소비자입니다. 대학원생은 이름만 학생일 뿐, 이제 학술적 지식을 생산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학생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박사과정 중 논문을 제외한 모든 졸업 요건을 충족하면 ’ABD(Anything But Dissertation)’라 부르고, 이 시점부터 교수 임용 자격을 갖춘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 때문에 미국의 교수들은 학부생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지만, 교수와 대학원생은 보통 서로 퍼스트 네임으로 부릅니다. 같은 지식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다소 다른 대학원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적이 없어 잘 몰랐는데, 지난 여름 한국에서 여러 대학원생을 만나 보니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시점’과 ’논문을 쓰는 시점’을 구분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논문은 입학과 동시에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논문 학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쓰기 시작하면, 진도가 더디거나 지도교수가 맞지 않거나, 연구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늦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입학 초기부터 여러 교수들과 1:1로 만나며 자신의 연구 방향을 탐색하고, 지도교수를 정해 꾸준히 논문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대학원생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닙니다. 내 본분은 지식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 대부분의 논문은 쓸 필요가 없다
대학원에 들어오면 보통 필드 세미나를 들으며 해당 분야의 주요 연구와 논쟁을 익히고, 동시에 연구 방법론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어디까지나 ’입문’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깊이 이해하고 능숙하게 활용하려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숙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첫 본격적 연습으로,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죠.
이상적으로는 학부 때부터 논문을 써보는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환경이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대학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논문의 시작은 질문입니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과 학술적 호기심은 다릅니다. 궁금한 것이 많은 것과, 어떤 한 주제를 ’끝까지, 밑바닥까지 파고들고 싶은 욕망’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가 바로 학술적 호기심입니다.
저는 이런 학술적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대학원, 적어도 박사과정에는 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사과정은 긴 시간, 큰 투자, 그리고 상당한 위험을 동반합니다. 이건 미국의 상위권 대학원에 풀펀딩을 받고 입학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회비용 때문입니다. 이 과정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상은 ’연구자’로서의 성장과 자신의 ’깊은 호기심’에 대한 답입니다. 그 호기심이 없다면 박사과정은, 특별히 박사 논문을 쓰는 시간은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논문은 내가 쓰지만, 그 가치는 동료들이 결정합니다. 저널에 논문을 제출하면, 에디터가 먼저 검토한 뒤 적절한 리뷰어들에게 보냅니다. 저자는 리뷰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에디터조차 리뷰 승낙이 완료되기 전에는 최종 리뷰어가 누구일지 모릅니다.
내가 학술적 호기심이 가는 질문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누구’에게, ’왜’ 이 논문이 ’도움이 될 것인지’입니다. 내 호기심만 충족시키는 논문은 저널에 실릴 이유가 없습니다. 학위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논문을 기준으로 학위가 수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학문 공동체에 기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연구가 부족하니 연구해야 한다’는 식의 서두를 가진 논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학문적으로 필요한 출발점일 수는 있으나 충분한 동기라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당연히 연구되지 않은 주제들은 수두룩합니다. 그에 반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유력한 저널의 숫자도 한정적이고, 그 저널에 실릴 수 있는 논문도 한정적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내 시간이 한정적입니다. 긴 커리어에서 열정과 체력을 가지고 왕성하게 연구할 수 있는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 귀중한 시간을, 많지 않은 기회를, 나는 왜 이 연구에 쏟아 부어야 할까요? 에디터와 리뷰어의 입장에서 이 논문을 왜 저널에 실어야 할까요? 독자는 대체 이 논문을 왜 읽어야 할까요? 그 독자는 누구인가요?
좋은 논문은 서론만 읽어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론이나 방법론에서 다소 약점이 있더라도, 문제 정의가 명확한 논문은 좋은 인상을 줍니다. 문제 정의는 언제나 문제 해결보다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잘 정의하지 못한 논문은 아무리 그 해결책이 그럴듯해도,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3. 연구를 잘 하는 방법은 지속적 개선 뿐이다
연구를 잘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잘 끝내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연구를 확장하고 지속하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연구자로서 힘든 점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이고, 좋은 점은 배움이 끝이 없다는 점입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연구자라는 직업은 너무 좋은 직업이죠.
대학 교수와 데이터 과학자로 모두 일해 본 제 경험상, 호기심은 적당히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집중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현장이 더 적합합니다.
반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현상과 다른 현상을 연결하는 개념적 도구, 이론적 틀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대학이 더 적합합니다.
학부생 때 수업에서 학기말 보고서(term report)를 쓰는 것과 논문을 쓰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논문은 초고(draft)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학기말 보고서도 그렇게 쓰면 안 되겠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마감 전에 처음으로 원고를 완성하고, 내버리니, 이것이 일반적 패턴이겠죠. 좋은 논문은 전혀 그렇게 쓰지 않고, 쓸 수가 없습니다. 이건 아무리 대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문, 책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추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 특별히 피드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논문이나 책에 감사의 말(acknolwedgement)이 따로 있습니다. 책의 경우에는 이 부문이 정말 길죠. 저는 책을 읽을 때 이것을 빼먹지 않고 읽어보는데, 어떤 커뮤니티를 통해서 이 책이 나왔는 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위 논문은 학위를 받기 위한 요건이라는 점에서 학기말 보고서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실상은 책이나 여러 논문의 합(논문 세 개를 합쳐서 박사 논문을 쓰는 경우도 많죠)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이 박사 논문을 기반으로 논문도 출판되고, 책도 나오죠. 후자의 경우는 보통 대학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고, 한 분야에 대해서 혼자 쓴 학술 도서라는 장르가 따로 있습니다. 이걸 모노그래프(monograph)라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이 모노그래프가 있어야 테뉴어를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대학과 학과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디어에서 초고까지 가는 것도 큰일이지만, 그 지점은 전체 여정의 절반일 뿐입니다. 그 이후에는 이론(argument), 증거(evidence), 구조(structure), 문체(style)를 끊임없이 다듬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가 아니라 “이 이상은 더 개선할 여지가 없다”는 수준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준은 생각보다 훨씬, 정말 훨씬 높습니다.
신뢰는 연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그 자산은 꾸준히 노력하여, 스스로를 증명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일부가 부정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들을 연구실에 불러와서 앉혀 놓고 제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제라도, ’내 이름’을 걸고 내는 것은 프로페셔널해야 한다.” 교수 한 명이 보는 과제도 그렇다면, 모두가 보는 논문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표절과 같은 윤리적 결함뿐 아니라, 사소한 오류조차 결국 모두 내 책임(all errors are my own)입니다.
연구자의 명성은 실력과 함께 신뢰가 기반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연구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 신뢰는 높은 기준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준이 출발점입니다. 높은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합니다. 리젝은 언제나 괴롭지만, 더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제 거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기입니다. 연구와 마라톤을 비교하면서, “연구는 스프린트가 아니라 마라톤이니 페이스를 조절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동의합니다. 하루에 논문을 완성할 수는 없으니, 체력을 안배하며 꾸준히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연구와 마라톤이 진짜 닮은 점은 고통입니다. 많이 뛰었다고 해서 마라톤이 쉬워지지 않습니다. 오래 달릴수록 더 고통이 크게 찾아 옵니다. 더 높은 목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수록 더 많은 시행착오가 따라옵니다. 그 고통 뒤에 성장이 있다고 믿고,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은, 오롯이 연구자의 몫입니다.
더 쉬운 길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길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연구를 잘하는 방법은 단 하나, 지속적 개선(continuous improvement)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