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박사 유학을 떠나는 후배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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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30일

2026년 6월 한국을 방문하며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 카이스트에서 연구 발표를 하고, 정말 많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고등교육재단 행사에도 참석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에서 오랜 동료들과 재회하고 새로운 연구 협력 네트워크를 만든 것도 의미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앞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할 학생들을 만났다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었습니다.

정치학, 컴퓨터과학, 심리학, 기계공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미국의 우수한 박사과정에 합격해 이제 막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학계로 진출하리라 가정하지 않기에 굳이 ’학문의 길’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습니다.)

이번에 미국 박사 유학을 앞둔 분들과 나누었던 세 가지 조언을 정리해 봅니다.

1. 우물은 넓고 깊게 파야 한다

미국의 좋은 대학과 학과에 유학을 가면, 단일 전공 안에서도 매우 다양한 주제가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연구되고, 그들 간의 경계가 낮으며, 연구 트렌드 또한 빠르게 바뀐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유력한 저널을 통해 혹은 국제 학술 대회를 가서 이런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학계에는 뛰어난 연구자들이 많고, 이들이 부단히,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에 유학 당시 주목받던 연구 주제가 수년 내에 소진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유행에 따라 연구 주제를 쉽게 바꿨다가는 해당 분야에서 오랫동안 준비해온 연구자들을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유행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어떻게 나의 연구 아젠다를 잘 개발하고, 또 그 연구 성과를 학계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제가 실천해온 방법은 자신의 주된 분야는 깊이 파되, 인접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꾸준히 배우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내가 풀려는 문제의 해답이나 단초가 다른 분야의 이론이나 방법에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런 접근법을 통해서 박사 논문부터 최근 연구까지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연구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선, 자신의 연구가 왜 다른 분야에도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는 역량 또한 필수입니다. 읽히지 않는 논문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연구자는 연구를 잘하는 것뿐 아니라, 그 연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또한 갖춰야 합니다. 교수는 연구 개발뿐 아니라, (연구의) 마케팅, 세일즈까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회사나 다른 조직 내에서 연구과학자, 데이터 과학자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 점수를 잘 받으려 하지 말고, 연구를 잘해야 한다

박사 유학을 가는 이들은 대부분 성적이 우수한 편입니다. 그래서 유학 후에도 강의를 잘 듣고 점수를 잘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원 때부터는 다른 게임입니다. 대학원생은 학생이 아닙니다.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이유는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대학원 성적표는 학계든 인더스트리든 일종의 재학 증명을 위한 서류 이상의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왔다면 이제부터는 ’학생’이 아니라 ’연구자’입니다. 수업을 듣고 있는 동안은 훈련 중인 연구자(graduate student)이고,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박사 후보생(PhD candidate)이 됩니다. 미국 기준으로는 논문을 거의 마무리한 단계(ABD: all but dissertation)에 이르면 이미 교수 채용 자격이 주어진 상태입니다.

박사 과정의 목표는 ’연구’입니다. 박사 과정을 잘 마쳤다면, 연구 성과가 좋아야 합니다. 연구를 잘 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일단 해야 합니다. 첫 학기부터 논문을 써야 합니다. 강의는 논문을 더 잘 쓰기 위한 지식, 방법, 아이디어, 도구를 제공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강의는 연구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발전시키며, 빠르게 시행착오를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번에 한국 대학원생들과 대화하면서 놀랐던 점은 수업 시기와 논문 시기를 명확히 구분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논문 학기에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논문쓰는 시간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혹은 논문을 쓰다가 논문 방향, 주제나 방법론에서 문제가 있을 때 이를 수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는 이미 늦었을 수 있습니다.

박사 과정에 들어왔으면 내가 잘 해야 하는 것은 연구라는 것, 연구를 잘 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면 좋습니다.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때는 학습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시작점이 아니라 성장의 기울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연구의 모멘텀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 키울 수 있는지입니다. 내가 졸업 시점에 어느 정도의 연구자로 성장해 있을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3. 편하게 연구하면 성장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박사과정을 마라톤에 비유하지만,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 비유가 자칫 ‘조급하지 말라’는 말로 축소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마라톤을 뛰려면, ’실제로’ 장거리를 뛰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한 주에 하루(롱런 데이)를 정해 평소보다 훨씬 멀리 뜁니다. 저 같은 경우는 평일에는 5-7km를 뛰고, 주말에는 10km와 하프 사이를 뜁니다. 이것보다 더 멀릴 뛸 때도 있습니다. 자기가 뛰어왔던 거리, 속도로만 뛰어서는 당연히 그 이상을 해낼 수 없습니다. 부상을 입지 않고, 일상에 무리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계속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한 주제나 기술만 계속 사용하는 것은 편할 수 있지만, 연구 주제는 고갈되고, 기술은 금세 한계에 부딪힙니다.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배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1번 조언과도 연결됩니다.

연구 초반에는 특히 ’금방 손이 닿는 질문(low-hanging fruit)’보다, 어렵지만 중요하고, 누구나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문제를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문제를 택했을 때, 빠르게 결과를 내지 못할 수는 있으나, 빠르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문제만 빨리, 많이 푼다고, 연구자로서의 역량이 향상되지 못합니다. 누가봐도 어려운 문제를, 이전보다는 더 잘 했다고 평가할 만큼 깊이 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경험을 쌓는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박사 과정(논문)입니다.

학술 연구에 있어 쉬운 길은 경쟁이 치열하고 유행도 빨리 바뀌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려운 길은 상대적으로 덜 경쟁적이고 변화 속도도 느려 안정적일 수 있습니다. 박사 과정처럼 수년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시기에는 후자의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 풀리는 문제를 붙잡고 여러 시도를 해보는 과정 자체가 큰 자산이 됩니다. 그 시행착오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은 나중에 다른 연구에서 활용 가능하기에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물론, 충분히 시도해보고도 풀리지 않는 문제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줄 아는 판단력도 필요합니다. 어떤 길을 남들이 잘 가지 않을 때는 많은 경우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다음 세 가지를 권합니다.

  1. 우물은 넓고 깊게 팔 것.
  2. 점수를 잘 받으려 하지 말고, 연구를 잘할 것.
  3. 편하게 연구하려 하지 말 것.